심규섭(미술이론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과 개념이 인류문명을 탄생시켰다. 인간은 밥이 아니라 삶과 존재의 이유가 함축된 개념으로 살아간다. 미술은 말씀과 개념을 가지고 현실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그 세계는 넓고 깊어야 하며 영원하며 아름다워야 한다. 인간은 미술이 창조한 시공간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간다.
지구환경이 바뀌고 있다. 특별한 의도보다는 그저 알지 못하는 질서가 추동하는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아름답게 창조한 인간의 세계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인간은 현실에서 불안한 진동을 감지했다. 전염병, 기후, 식량이라는 삼재(三災)이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변화하고 있었지만 생존과 쾌락에 집중하느라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살을 찌르는 고통과 함께 현실 속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탓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탄소중립을 외치고 분리수거를 실천한다고 지구환경의 변화를 막을 수 없다.
작가는 세상의 떨림에 민감하다. 그 떨림이 뭔 지 알기 위해 창작하지는 않는다. 떨림이 작용이라면 창작은 반작용이다. 내면의 질서가 흔들릴 때, 통일. 변화. 균형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본성적 행위가 창작활동이다. 미술은 도발이다. 평온한 사회에서는 도약을 위한 도발이 필요했다. 삼재의 혼돈세계에서 미술은 평안이다. 씨앗을 현미경으로 본다고 해서 생명의 본질을 알 수는 없다. 그저 괴기한 조직체와 비생명의 요소들로 가득하다. 본다는 행위는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넘어 개입하는 것이다. 개입에는 책임이 따르고 작가는 내면에 상처를 품는다. 미술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게 화폭이다. 화폭은 작가에게 거대한 세계이다. 현실이라는 3차원 공간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4차원 세계이다.
무채색과 농담(濃淡)을 이용한 공간과 4차원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생명과 사물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 안에 견딜 수 있는 존재는 물방울, 미토콘드리아 다발, 꿈틀거리는 유기물 따위이다. 물컹거리는 시각적 촉감의 세계이다. 붓질은 촉감을 주물러 시각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붓질은 반복의 연속이다. 창작은 고난도의 기술적 구현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찰나(刹那)의 영감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하다. 밑도 끝도 없는 무채색의 평평한 공간 속에서 움직임이 감지된다. 얕은 층을 중첩해 만든 결을 따라 올라오고 가라앉고 모이고 흩어진다. 혼돈과 질서가 교차하는 카오스모스이고, 간질간질한 호흡의 프렉탈이다.
간지럼은 시각적 몰입과 자극에 대한 원초적 반응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고, 눈을 뜨면 사라지는 역설의 세계, 양극단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세계가 펼쳐진다. 삼재(三災)는 책임과 실천이 아니라 반응의 영역이다. 삼재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것은 해결할 수 있다. 두려움과 상처는 모두 무지에서 발생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영역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치유와 위안을 말하는 것은 삼재에 대한 반응이다. 치유는 인간의 영역이다. 동물과 식물, 신선한 공기, 맑은 물 따위는 인간을 치유하지 못한다. 사회 속에서 얻은 병은 사회가 치유하고, 인간에게 받은 병은 인간이 치료한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고통을 현실적 사람의 손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삼재의 병균이 묻었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술적 은유와 문화적 대체가 필요하다. 인간의 손길은 동물의 재롱으로, 냄새는 식물의 향기로, 사람의 숨결은 맑은 물과 공기로 바꾸어야 한다. 미술 작품은 가혹하지 않아야 한다. 등을 떠밀고 몰아붙이는 것은 삼재의 현실로도 충분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숲속으로 들어가듯, 작가는 시공간이 멈춰진 그곳에서 말이 아닌 형상으로, 손길이 아닌 붓질로 속삭인다. 개념과 현실의 경계가 살짝 어긋나 눈이 가려울 것이다. 아이가 옹알이를 하듯 뇌가 간지럽다고 느낄 것이다. 뇌가 반응하면 살아있는 것이다. 치유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